살며 생각하며/내가 좋아하는 시 195

옛날 사람 -곽효환-

때론 사랑이 시들해질 때가 있지 달력 그림 같은 창밖 풍경들도 이내 무료해지듯 경춘선 기차 객실에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다 넓은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이 든 그 설렘도 덕수궁 돌담길 따라 걷던 끝날 것 같지 않은 그 떨림도 북촌마을 막다른 골목 가슴 터질듯 두근거리던 입맞춤도 그냥 지겨워질 때가 있지 그래서 보낸 사람이 있지 세월이 흘러 홀로 지나온 길을 남몰래 돌아보지 날은 어둡고 텅 빈 하늘 아래 드문드문 가로등불 오래된 성당 앞 가로수 길에 찬바람 불고 낙엽과 함께 뒹구는 당신 이름, 당신과의 날들 빛바랜 누런 털, 눈물 그렁그렁한 선한 눈망울 영화 속 늙은 소 같은 옛날 사람 시들하고 지겨웠던, 휴식이고 위로였던 그 이름 늘 내 안에 있는 당신 이제 눈물을 훔치며 무릎을 내미네 두근거림은 없어도 이..

가을 우체국 앞에 서면

-배귀선- 가을 우체국 앞에 서면 그리움 가득 담은 가을편지에 코발트 하늘 실어보내고 싶다 누구에게라도 사랑 고백담은 색 고운 가을엽서 띄우고 싶다 내게도 간절한 시간이 있었음을 길 가 코스모스 볼을 부비고 우체국 지붕 위 내려앉은 파란 하늘 찬란했던 여름이 지고있다 가을우체국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되뇌이는 말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바람의 말 -마종기-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