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동 공락춘 이층방에서 선배가 약혼을 했다. 고등학생인 우리는 짜장을, 선배들은 짬뽕 안주에 배갈(고량주)을 마셨다. 신부에게 준 예물은 곰인형. 형수는 참 예뻤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운 약혼식으로 기억된다. 1976년 동숭동 소방서 옆 성베다
교회는 대광고와 숙명여고가 주축인 한빛모임의 집회장소였고 난 한빛 19기 회원이었다. 그곳은 아직
대학로라 불리기 전이었으며 바로 전해인 1975년,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사했다. 대학로란 명칭은 1985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불린다. 당시 동숭동을 대표하는 두 곳의 중국집이 있었다. 공락춘과 진아춘. 서울대 시절, 문리대와 법대는 두 중국집을 자기들만의 아지트처럼 각각 점령했다.
우린 공락춘파였다. 소방서를 바라보면 왼편에 있었으나 지금은 공락춘도, 성베다교회도 모두 동숭동에서 사라졌다. 진아춘은 대로를 떠나 골목으로 숨었고, 서울대의 이사는 동숭동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대학로는 점차 유흥지역으로 바뀌었다. 할아버지 해장국집이나 화방의 대명사였던 아폴로 화방 같은 터줏대감들이 동숭동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5년 시인이면서 당시 문예진흥원장이었던 정한모 선생의 건의에 따라 대학로란 명칭이 정식으로 부여됐다. 낙타등처럼 생긴 낙산 아래 종로5가에서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쭉 뻗은 길을 따라
문화예술 거리가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 시절의
건물이 몇 개는 남아 있으나 예전의 고즈넉한 풍경은 이젠 찾기 힘들다.
그래도 다행스럽다고 할까, 1956년에 개업한 학림다방이 아직 그대로 있다. 물론 지하철
공사로 건물의 모습은 다소 변했지만 다락방이며 진한 원두커피의 맛은 그대로다.
학림의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면 풍경이 늘 가을 같다. 그것은 아마도 길 건너에 있는 흥사단과 샘터사 외벽의 붉은 벽돌색이 늦가을 단풍색을 닮은 까닭도 있을 것 같다. 다방에선 여전히 LP판
고전음악이 따스한 소리로 잔잔히 들려온다. 참으로 커피향과 잘 어울린다. 2012년의 강남 스타일이나 세련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1960년대나 1970년대로 시간이동을 한 듯하다. 1960년대의 남루한 모더니즘이나
낭만주의 또는 1970년대의 저항주의 어딘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다방 입구의 글귀가 공감된다.
“학림은 지금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현재’의 시간 위에 ‘과거’를 끊임없이 되살려 붙잡아 매두려는 위태로운 게임을 하고 있다.” (황동일)
대학로 서울대병원을 지날 때마다 착잡하다. 평생 절친의 딸이 고등학생이란 어린 나이로 힘들게 투병한 적이 있다. 소녀의 병명은 백혈병. 혈액암이다. 혈액암 병실은 아무런 장식도 없다. 그야말로 살벌함까지 느끼게 하는 하얀 콘크리트 상자. 나는 시집갈 때 주려고 한 선물을 미리 준다며 화사하게 그린 종이그림 몇 점을 벽에 테이프로 붙여 장식해 주었다. 혈액암 병실은 분진 때문에 벽에 못을 박을 수 없다. 위안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소녀는 그냥 속절없이 떠났다. 장례가 치러질 때 슬픔을 억누르고 조문객을 받던 친구의 모습이 통곡보다 오히려 더 슬프게 보였다.
어쩌면 대학로가 그래도 옛 향수를 느끼게 하면서도 새로운 문화의 태동을 기대하게끔 보이는 것은 샘터사옥이 있기 때문에 아닐까. 현대의 소비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어지러운 상가들과 다소 고리타분하고 음침해 보이는
문화예술진흥원이나 서울대병원의 옛 병동 같은 과거의 유물 속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맞춰주는 듯 보인다. 샘터는 본래 서울대 도서관 자리. 그 앞으론 개천도 흘렀고 일명 미라보
다리도 있었다. 샘터사옥은 고 김수근 선생의 작품. 선생의 명성답게 명작이다. 담쟁이가 건물 전체를 덮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현재는 선생의 제자인 승효상 선생이 부분적으로 개축을 하고 있다.
승 선생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다. 또한 대단한 술꾼이다. 지난 초여름에 열흘간 프랑스의 수도원들을 몇몇 지우와 함께 승 선생의 명강을 들으며 기행한 적이 있다. 선생의 놀라운 기억력에도 놀랐지만 소위 승효상폭탄주라 일컫는 샴페인에 코냑을 부어 제조한 요상한 술을 누군가가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될 때까지 입에 부어대는 해괴한 주법 때문에 매일매일 밤이 고통스러웠고 또 행복했다. 밤은 천국, 아침은 지옥의 연속이었으니, 유명 건축가는 어떤 집에 살까가 궁금했다. 선생은 사무실 위 건물 옥상에 산단다. 역시 선생이 추구하는 비움의 미학과 상통하는 검박한 취향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의 사무실도 동숭동에 있다.
1970년에 창간한 ‘샘터’라는 잡지를 안 읽어본 이는 드물 터. 따뜻한 시선으로
건강한 사회를 위해 시대의 거울이 되어 40여 년간 한 길을 걸어 온 소중한 월간지다. 그동안 샘터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런데 난 샘터에 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샘터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발간됐는데 나오자마자 인기가 대단했다. 작고
간편한 판형에다 한글전용, 그리고 매회 넘쳐나는 훈훈하고 감동적인 읽을거리들이 어른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같은 아이들까지도 호기심이 발동했을 정도다. 어느 날 나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해 인기를 끌었던 ‘소년중앙’이란 잡지를 산다며 아버지께 돈을 탔다. 그전까진 ‘새소년’과 ‘어깨동무’란 어린이 잡지가 유명했지만 쌈박하면서도 화려한 소년중앙의 출현은 어린이들 세계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데 다른 것도 사다보니 소년중앙을 살 돈이 모자랐다. 그래서 대신에 값이 저렴한 샘터를 산 것. 어지간해서 화를 안 내는 아버지께서 나중에 이 사실을 아시곤 의외로 날 꾸짖으시는 게 아닌가. 정직하지 못하다며. 평생 아버지가 그렇게 화내셨던 적은 두 번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다른 한 번은 고교 입학원서 작성할 때 나의 어처구니없던 성적에 놀라서였고. 하여튼 그때나 지금이나 샘터는 싸다. 현재는 2500원. 9월호를 펼쳐보니 짝사랑이 특집. 옛날 생각나게 만드는 단어다. 내 기억 속의 마지막 짝사랑은 언제였지. 짝사랑마저 없는 삶은 너무 메마른데….
샘터의 발행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은 7선의 관록에다 네 차례나 서울대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존경받는 명사였지만 1993년 ‘토사구팽’이란 말을 남기고 정계를 떠났다. 사냥이 끝났으니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역시 정치는 무섭다. 현재는 영식인 김성구 사장이 샘터를 발간하고 있다. 김 사장은 일찍 수염을 길렀다. 조선일보 기자 시절부터 그의 수염은 유명했다. 다듬지 않은 수염과 짧은 머리칼, 도수 높은 동그란 은테안경, 스포츠용 손목시계 그리고 여름이면 늘 반바지. 이쯤되면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 대략 짐작될 것 같고. 김 사장은 자유인이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 담백하다. 명망 높은 집안의 도련님이지만 대단히 소탈하고 순정마초적인 남자다. 일상에선 감동의 빈도가 아이 못지않다. 어린 왕자가 약간 불량스럽게 성장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토끼가 자랐는데 당나귀가 됐다. 그런데 당나귀가 뜯어볼수록 더욱 매력적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도 술이 세다. 티 안내는 고수다.
그러고 보니 대학로엔 고수가 많다. 쇳대박물관의 최홍규 관장도 고수다. 박박 밀어버린 머리스타일부터 심상치 않다. 최가철물점을
경영하면서 2003년 마로니에
공원 뒤편 골목에 독창적이면서 멋진 박물관을 건립했다. 쇳대라니, 참으로 기발났다. 쇳대는 열쇠의 방언. 녹슨 철판으로 뒤덮인 독특한 건물은 승효상 선생이 설계하고 법정 스님이 간판의 글씨를 쓰셨다. 샘터 김성구 사장이 낭만적이고 따뜻한 맘씨의 문화전도사라면 쇳대 최홍규 관장은 문화검객 같다. 예리한 감각과 풍운아적인 존재감이 물씬하다. 만만치 않은 내공의 소유자다. 그런데 구멍이 있는 자물쇠가 음과 여성을, 열쇠는 양과 남성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아실는지. 그래서인지 대체로 양을 추구하는 서양은 열쇠가 발달했고, 음의 동양은 자물쇠 몸통이 발달했다.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조선시대의 ㄷ자형 자물통들을 보노라면 마치 현대의 조각품을 보듯이 군더더기가 없고 세련돼서 놀랍다. 입구에서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1만 원짜리 엿장수 가위가 모습은 투박한 게 앙증맞으면서 의외로 잘 들어 두 개나 샀다. 최 관장도 술이 세다. 같이 마셨다가 혼났다. 기억이 끊겼다. 대학로는 터가 이상하다. 예전엔 이곳 어딘가에 양조장이 있었을 것 같다. 그때 흘린 술들이 땅속에 숨어 아직 안 마르고 있는 것 같은 의심이 든다.
또 한 명의 대학로 고수를 소개하고 싶다. 꼭두박물관 김옥랑 관장이다. 여성이다. 꼭두는 인형을 대신한 말. 전통 상례에서 망자를 묘지까지 운반하기 위해 상여가 사용됐는데, 꼭두는 이 상여에 놓였던 나무 조각품이었고, 이미 이승에서 떠났지만 아직 저승에 도착하지 못한 망자를 위해 친구도 되고 수호자도 되고 하인도 되는 것이다. 세상에 있기도 하고 세상에 있지 않기도 하다. 마치 소풍 가는 아이처럼 꼭두의 모습이 씩씩하고 천진난만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슬픔과 눈물이 담겨 있기도 하다. 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아름다움이다. 한국인의 해학과 원초적 정서가 그대로 담겨 있다.
아무도 꼭두에 관심 갖지 않았을 때인 1970년대 초부터 김 관장은 꼭두를 수집했다. 그 수가 지금은 2만 점이 넘는다고 한다. 엄청난 집념이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다가 무심코 찾아온 꼭두와의 인연이 인생을 바꿨다고 그녀는 고백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40년. 김 관장의 꼭두인생은 2년 전 동숭아트센터 안에 꼭두박물관을 건립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전통의 현대적 재창조를 성실히 이행하듯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우리 것이면서도 세계적인 보물 같은 박물관을 구현했다. 상이라도 줘야 할 만큼 자랑스럽다. 그녀와 대면한 적은 없고 음주로 대작한 적은 더더욱 없다. 그런데 반 년 전인가, 안국동 카페 아리랑에서 뒷좌석의 김 관장을 본 적이 있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고 아름다워 놀랐다. 그렇지만 왠지 술이 셀 것 같다. 조심해야겠다.
대학로 고수를 한 명 더 소개한다. 미스터피자 2층 구석에 처박혀 있는 와이미용실의 이강대 원장. 1970년대쯤의 미용실같이 남루한 미용실. 그런데 여긴 늘 손님들로 바글바글. 30분, 1시간 기다리는 건 예사다. 최고의 가위손 이 원장 때문이다. 미용계의 고수다. 이곳의 커트 가격은 고작 9000원. 나는 단골이 된 지 10년 조금 넘었는데 맹세코 그동안 단 한번도 다른 곳에다 머리를 맡긴 적이 없었다. 주로 지하철을 타고 오지만 가끔 택시를 타면 왕복 2만6000원. 그래도 나는 줄기차게 여기만 온다. 왜냐면 좋으니깐, 실망시킨 적 없으니깐. 이 원장은 얼마 전 삼송리 풍광 좋은 곳에 42평 신축 아파트도 장만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의 두 아들과 아내를 앉혀놓고 막걸리 한잔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란다.
2012년 9월의 일요일 오후. 샘터사에서 혜화동성당으로 슬슬 걸어가다 길가에 있는 김광균의 시비(詩碑)를 봤다. “머언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설야’의 한 구절. 참 좋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이 시구절의 장면을 상상하며 흐뭇해하던 때가 아른거린다. 매주 일요일 혜화동성당 앞은 필리핀 장터. 빼곡히 들어선 필리핀 노점상마다 웃음꽃이 핀다. “남는 게 너무 없어요. 나도 먹고살아야지요.” 익숙한 한국말이 정겹다. 모두들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뭐가 저리도 좋을까. 낙천주의의 종결자들이다. 그래 좋다. 나도 마부하이(Mabuhay)다. 안녕하세요란 필리핀 말이란다. 내 얼굴도 덩달아 행복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이 오빤 필리핀 스타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