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i Sonate M.S. 27 (Op. 3) For Violin And Guitar
Sonata No.6 in E minor
I. Andante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 1782.10. 27- 1840.05.27)는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안토니오(Antonio) 와 테레사 파가니니( Teresa Paganini)의 여섯 자녀중 세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실패한 무역상으로 집안 살림은 만도린 연주로 수입을 충당했습니다.
파가니니는 5살 때 아버지에게서 만돌린을 배웠고, 7살 때는 바이올린으로 옮겨갔는데
그의 음악적 재능이 빠르게 소문이 퍼지면서,
바이올린 레슨으로 많은 장학금 수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역의 바이올리니스트들에 사사했는데, 빠른 속도로 그들의 능력을 따라잡는 바람에
마침내 아버지는 파가니니를 데리고 알레상드로 롤라(Alessandro Rolla)에게
사사받게 하려고 파르마(Parma)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 파르마(Parma)는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바로 비올라 기교주의자(Virtuoso)로
파가니니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물입니다.
동시에 훌륭한 제자로 인해 훗날 "위대한 파가니니의 스승"으로 기억됩니다.
이렇듯 만돌린으로 시작한 첫 걸음이, 바이올리니스트로 성공을 거두자
유럽 어느 나라를 가거나 뜨거운 환영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비에니아우스키(1835~1880), 요아힘(1831~1907), 사라사테(1844~1908)와 함께
바이올린계의 4걸로 낭만파의 특징이랄 수 있는 기교주의자(Virtuoso)들의 선봉이었습니다.
신동인 그는 8세 때 바이올린 소나타를 썼으며, 11살에는 대중 앞에 섰고,
16살에 이르러서는 독보적인 존재로서 이탈리아 각지를 순방하게 됩니다.
46세인,1828년 이후로 베를린, 빈, 런던, 파리 등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각지에서
신기에 가까운 기교와 이상한 풍모로 바이올린의 마왕이란 호칭을 받기도 했습니다.
파가니니가 빈에 나타났을 때 슈베르트는 책을 팔아서 입장권을 사고,
리스트는 감격한 나머지 자기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그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바이올린의 음역을 확대시키고, 화성에 매혹과 광채를 더했으며.
또 높은 음에서 2중주의 주법을 이룬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배음의 연주, G선만의 연주, 왼손으로 줄을 퉁기어 바른 손의 활의 음과 결합시키는 등
놀라운 주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독창적 기교는 근대 바이올린 기교의
기초가 되었고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작품도 많이 썼지만, 생전에 출판된 것은 소나타 12곡, 키프리스 24곡, 4중주곡이 3곡,
그리고 그의 사후에 발견된 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변주곡이 있습니다.
특의 그의 caprice in A minor, Op. 1 No. 24는 그의 작곡중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ms)에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에
이르기까지 다른 걸출한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