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사석원의 '서울 戀歌'

낭만과 예술이 흐르던 그곳… 잘가라 명동, 추억에 건배를!

FREE AS THE WIND 2012. 9. 18. 16:23

출처: 문화일보

사석원의 서울 戀歌 게재 일자 : 2012년 08월 10일(金)
낭만과 예술이 흐르던 그곳… 잘가라 명동, 추억에 건배를!
1975년 여름. 중학교 3년생인 나는 방학을 맞아 친구 오성식, 김명국과 함께 서해안의 섬 덕적도로 여행을 갔다. 스스로 떠난 최초의 여행이었다. 바다도 처음 봤다. 바닷가에서 텐트 치고 밥도 해먹고 파도소리와 함께 잠을 자며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때 바로 옆 텐트엔 서울서 온 누나들이 있었다. 비교적 예뻤고 더군다나 그쪽도 우리와 똑같이 세 명이었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야한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있어서 우린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누나들은 그런 차림으로 우리와 백사장에서 공놀이도 하고 밥도 같이 해먹고 수영도 했다. 때론 물속에서 갑자기 솟구치면 누나들의 가슴만 살짝 가린 수영복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젊은 여자의 가슴을 처음 봤고 바다가 참 고마웠다.

누나들은 모두 서울 명동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둘은 미도파 백화점에서 한 명은 톰보이란 여성의류매장에서 일했다. 톰보이에서 일하는 누나가 제일 예뻤다. 서울에 와서 우리는 사진 교환을 핑계로 누나들을 몇 번이나 만났다. 명동따로국밥집과 명동교자가 있는 먹자골목에는 월남국수집이 있었다. 요즘의 베트남 쌀국수와는 전혀 달랐다. 막 월남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동그란 면이 고무줄처럼 쫄깃쫄깃했는데 그 신기한 국수를 먹고 로얄호텔 건너에 있는 탁구장에서 탁구를 치기도 했다. 2년 전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우리 여자선수들이 중공을 꺾고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 우승을 했다. 귀국 때 카퍼레이드도 하고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그 때문에 탁구붐이 일어 전국에 탁구장이 갑자기 많이 생겼다. 우리 할머니도 부랴부랴 면목동에 탁구장을 만들었다. 거기서 나는 혼자 오는 사람을 위해 같이 쳐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진짜 탁구선수가 되어 2년여간 운동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누나들과 제과점도 갔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고생들이 보호자 없이 친구들끼리만 빵집에 갔다가 교외단속 선생님께 걸리면 정학을 받기도 했다. 빵집을 ‘후랏빠’라고 하는 불량 학생들의 온상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덕적도에서 만난 세 명의 예쁜 누나들 때문에 명동은 우리에게 달콤하고 두근거리는 낭만의 장소로 기억됐다. 누나들과 만날 명분을 찾지 못한 우리는 명동에 관한 금단증세가 생겼다. 명동을 못 가면서 삶이 무기력해졌다. 공부도 운동도 관심이 없었다.

그즈음 가까운 친구 몇 명과 엉뚱하게도 갑자기 화투놀음에 빠졌다. 한 해 전 가을, 속리산으로 간 수학여행에서 화투를 배웠고 그중 ‘섯다’란 종목에 우린 심취했다. 화투패 두 장으로 땡이나 족보가 높으면 이기는 놀음이었다. 김명국, 오성식, 이천직, 소승호와 나는 학교 앞 윤영구의 빈집에서 거의 매일 섯다를 했다. 물론 돈을 걸고 했다. 친구 부모님이 돌아오시기 전 서둘러 판을 접고 그 돈으로 우리는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진출했다. 매일매일 초저녁마다 출근했다. 명동어귀 미도파백화점과 코스모스백화점엔 정말 예쁜 액세서리나 학용품이 많았다. 서울에서도 변두리인 면목동, 그것도 용마산 꼭대기에 있던 면목중학교에 다니는 촌뜨기들로서는 모든 게 황홀했다. 그러나 고입 연합고사가 다가오고 내 성적으론 인문계 주간은 못가고 야간 정도를 겨우 갈 수 있다는 담임선생님의 진학평가가 있었다. 70명 중 35등쯤의 성적이었다. 대학은 하도 많이 떨어지니 그래도 괜찮지만 고입 연합고사에 떨어지면 큰 창피였기에 명동기행도 끝장났다. 좋은 시절이 지나간 것이다.

1960년대 서울선 웬만큼 사는 집에는 가정부가 있었다. 식모라고 불렀다. 몇 해 전 TV에서 ‘내사랑 삼순이’란 드라마가 있었는데 예전엔 삼순이란 일반적으로 식순이, 차순이, 공순이를 지칭하는 좋지 못한 단어였다. 우리집에도 식모누나가 있었다. 순덕이 누나였다. 코가 크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았다. 우린 사이좋게 지냈다. 나는 집에서 병아리 기르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 병아리란 놈들은 모이를 많이 주면 배가 불러도 계속 먹는다. 그러면 모이주머니가 털 바깥으로 불쑥 튀어나오고 곧 터져 죽을 것같이 보인다. 순덕이 누나와 나는 병아리 수술을 했다. 튀어나온 모이주머니를 면도칼로 베어서 내용물을 빼고 가는 실로 꿰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병아리는 바로 죽었다. 우리들의 수술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순덕이 누나에겐 한 달에 한 번 외출이 허락됐는데 그날이면 누난 꼭 명동에 갔다. 있는 대로 멋을 냈고 때론 고모들 옷을 빌려 입고 나가기도 했다. 돈이 없으니 뭘 사는 건 아니었다. 그냥 하루 종일 명동의 의상실 쇼윈도에 걸린 옷들을 보거나 백화점을 쏘다니다 돌아왔다. 명동은 서울의 서울이었다. 모든 유행은 명동에서 탄생했다. 1960년대나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명동과 그 주변 말고는 갈 만한 번화가가 거의 없었다. 종로의 화신백화점이나 신신백화점 근방이나 갈까. 아직 강남은 개발 전이라 논밭이나 과수원이 많았다. 식모살이로 갖은 고생을 해도 휘황찬란한 명동을 한 달에 한 번 본다는 것만으로도 누나는 충분한 보상을 받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명동은 서울의 모든 식모누나들에게 무지개 피어 있는 꽃동산이었다.

성당 앞 로얄호텔에선 결혼식도 할 수 있었다. 호화결혼식인 셈인데 둘째 고모도 거기서 결혼식을 하고 유네스코 쪽으로 내려와서 한일관 갈비탕으로 하객들을 대접했다. 그날 비가 굉장히 많이 왔다. 결혼식 날 비가 오면 잘산다는 속설처럼 고모는 고모부랑 아주 다복하게 잘살고 계신다. 음대 작곡과에 다니던 막내고모를 위해 명동 대한음악사로 악보 사오는 심부름을 자청하기도 했다. 즐거운 나들이였다.

대연각호텔 화재로 명동이 어수선하다가 1970년대 말 반도호텔 자리에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최고급 호텔이 들어섰다. 롯데호텔이었다. 1979년 1월 나는 서울미대 입학시험에 낙방했다. 부모님이 나를 위로해 주신다며 명동 사보이호텔 앞에서 전기구이 통닭으로 외식을 하고 롯데호텔 로비에 있는 그릴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너무 비싸 하나만 주문해서 셋이 나눠 먹었다. 크리스털 유리그릇에 아주 부드러운 크림색 아이스크림이 탑처럼 높게 쌓여 있고 각종 열대과일들이 얹혀 있었다. 예쁜 우산도 꽂혀 있었다. 그런 아이스크림은 먹은 적도 없을 뿐더러 본 적도 없었다. 호텔 상점의 진열장엔 이태리 신사화가 놓여 있었는데 가격이 12만 원이었다. 아버지는 저렇게 비싼 구두를 어떻게 길바닥에서 신고 다닐 수 있겠느냐며 놀라워하셨다. 그 당시 국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그쯤 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극이 명동에서 사라지진 않았다.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추송웅이란 배우가 열연하는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모노드라마가 화제였다. 그는 ‘살롱 떼아뜨르 추’라는 소극장도 명동에 열었다. 그러나 그가 1985년 44세로 사망하면서 명동에서 연극은 사라졌다.

어머니는 화가가 꿈인 내 걱정을 많이 하셨다. 어느 날엔 TV를 보며 울고 계셨는데 화가 이중섭의 애절한 삶을 그린 연극이었다. 석원이가 저렇게 힘들게 살면 안되는데 하며 우시는 것이었다. 지금은 국민화가로 칭송받고 있는 이중섭은 1955년 명동 미도파화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정식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된 작품 45점 중에 26점이나 예약되는 드문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예약된 작품은 영원한 예약으로 그친 게 허다했다. 과시욕과 허영으로 믿지 못할 예약을 남발한 것이다. 중섭은 순진하게도 성공을 확신하고 신세 갚는다며 외상으로 매일 명동에서 친구들과 비싼 술을 마셨다. 전시 후 중섭은 파산에 이르렀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궁핍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이듬해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 신분으로 쓸쓸히 혼자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0세였고 어쩌면 고흐보다도 더 비극적인 삶이었다.

현재 공사 중인 명동 중국대사관은 원래 자유중국대사관이었다. 1970년대엔 대만을 자유중국, 중국은 중공이라 불렀다. 1976년 말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교복을 입고 자유중국대사관의 굳게 닫힌 웅장한 문을 두드렸다. 유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대학생들과 화실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훨씬 잘 그리는 것 같은 착각을 했고 교만은 나날이 심해졌다. 그러니 한국에선 더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해 자유중국으로 유학을 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조기유학은 불가능.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을 마친 후 다시 오라는 설명을 듣고는 힘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동국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교양학부 강의를 담당하던 교수 중엔 국보급 문인들이 재직하고 있거나 거쳐 가셨다. 양주동 박사나 미당 서정주 시인도 계셨다. 내가 입학하던 해 미당 선생은 정년퇴임했다. 그분은 학생들과 고고장 가는 걸 좋아하셨다. 명동 마이하우스라는 고고장까지는 학교에서 불과 두 정거장. 명동 가는 버스 안에서 머리 땋은 여학생을 보면 예쁘다며 조물조물 막 만지기도 하셨다. 그러면 여학생은 낯선 할아버지가 막무가내로 자기 머리를 만지니까 혼비백산하고. 그땐 나이트클럽을 고고장이라고 불렀다. 코파카바나, 바나나클럽, 로젠켈러, 우산속, 마패 등이 서울의 유명 고고장이었다.

1981년 명동 코리아극장에서 임권택 감독의 명작 ‘만다라’를 봤다. 흰눈이 쌓여 있는 겨울풍경이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대지. 광대한 자연 속에서 삶의 길을 찾으려 고뇌하는 스님들. 뭔가에 얻어맞은 듯 대학생인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짜릿하면서도 저려오는 가슴을 붙잡고 간 곳은 명동의 음악 감상실 ‘필하모니’. 홀로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말러 교향곡과 브루크너의 현란한 협주곡을 들으며 인생이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뭐가 예술인지를 곱씹기도 했다.

지금은 2012년 8월. 연일 35도가 넘는 무더위다. 나는 환갑이 거의 다 된 명동따로국밥집에서 국밥과 막걸리 한 통으로 궁상맞게 홀로 늦은 점심을 하고 있다. 에어컨이 잘 안들어와 등줄기에 땀이 밴다. 마치 30년 전이나 40년 전의 냉방기 없는 시절의 여름으로 돌아간 것 같다. 뒷좌석에선 일본인 관광객들이 모둠전에 맥주를 마신다. 시인 박인환과 이진섭이 즉석에서 시를 짓고 작곡을 하고 임만섭이 노래한 명동샹송 ‘세월이 가면’이 탄생했던 빈대떡집이 명동에서 사라진 지는 아주 오래전이다. 박수근, 김수영, 전혜린, 이봉구, 변영로, 손응성 등 당대의 멋쟁이 예술가들이 끝까지 수호하려 했던 최불암 씨의 어머니가 주인인 주점 은성도 지금은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명동은 온통 공사 중이다. 커피숍이나 화장품 가게로 변신 중이다. 명동성당마저도 공사장비를 가득 실은 트럭들로 북새통이다. 행인들은 태반이 외국 관광객들이고 점원은 낯선 외국어로 손님을 잡아끈다. 이제 명동은 그 시절 명동이 아니다. 낡은 건물에 허름한 옷차림의 행인들, 꽃 파는 소년, 호외를 돌리는 고학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가들로 북적거렸던 주점과 다방들. 이젠 그런 건 명동에 남아 있지 않다. 다시는 예전 명동은 볼 수 없다. 나는 내가 봤던, 또 그보다 훨씬 전 인간의 냄새와 예술의 향기가 진동했던 명동을 그리며 쓸쓸히 막걸리를 장마처럼 잔에 쏟아붓는다. 허공에 건배다. 추억에 건배다. 잘 가거라, 안녕 명동이여!